9급 지방직 공무원 한국사 필기 기출문제복원 (2014-03-22)

9급 지방직 공무원 한국사
(2014-03-22 기출문제)

목록

1과목: 과목 구분 없음

1. (나)는 (가)의 결과이자, (다)의 원인이 되었다. (나)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1.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
  2.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3.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다.
  4. 고조선은 중국 대륙과 한반도 남부의 직접 교역을 막아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정답률: 85%)
  • 주어진 지문의 흐름은 (가) 위만조선의 세력 확대 -> (나) 위만조선의 특징적인 정책 -> (다) 한나라의 침략으로 이어집니다.


    * (가) 위만 왕조는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이 철기 문화를 수용하고 확산시키며 군사적, 경제적 힘을 키웠음을 의미합니다.

    * (다) 한 무제의 대규모 무력 침략을 받아 마침내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는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이 한나라의 침략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나)에는 (가)의 결과이자 (다)의 원인이 되는 위만조선의 정책이나 상황이 들어가야 합니다. 위만조선은 확장된 세력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여 번성했으나, 이것이 한나라와의 갈등을 심화시켜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정답 해설:

    (가) 위만조선이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한 결과, (나) 고조선은 중국 대륙과 한반도 남부의 직접 교역을 막아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나, 동시에 (다) 한나라의 경제적 이권을 침해하여 한 무제의 대규모 무력 침략을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흐름에 가장 적절한 내용은 중계무역 독점입니다.


    오답 해설:

    *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는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 시기 이야기로, 위만조선의 특징이나 멸망 원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위만이 고조선에 들어와 정권을 잡기 이전의 상황으로, (가)의 결과나 (다)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다."는 고조선 전체의 성장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가)의 결과이자 (다)의 원인이라는 구체적인 인과 관계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2.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것은 분권적인 봉건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2. 한국사는 한국인의 주체적인 역사이며 사회구성원들의 총체적인 삶의 역사이다.
  3.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세계사 안에서 한국사를 올바르게 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4. 다양한 기준에 의거해 시대구분을 하더라도 한국사의 발전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답률: 93%)
  • 해당 설명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요 논리 중 하나입니다. 조선의 식민지 전락 원인을 내부적인 봉건제 결핍에서 찾음으로써, 한국사의 자율적인 발전 가능성을 부정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올바른 한국사 이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3. 다음 사실이 나타난 시기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포구에 객주나 여각이 크게 발달하였다.
  2.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3. 활구의 제작으로 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4. 주점과 다점 등 관영 상점이 크게 늘어났다.
(정답률: 76%)
  • 제시된 자료는 "통공 발매"의 효과로 면포 가격이 안정되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 후기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의 경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해통공은 1791년(정조 15년)에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하여 사상(私商)의 활동을 자유롭게 한 조치입니다.

    * 정답 해설:
    조선 후기에는 통공 정책으로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객주여각포구를 중심으로 물품 매매 중개, 운송, 보관, 숙박, 금융업 등을 겸하며 크게 발달했습니다. 이는 지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입니다.

    * 오답 해설:
    * 벽란도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입니다.
    * 활구(闊口, 은병)고려 시대에 주조된 화폐입니다.
    * 주점다점관영 상점은 주로 고려 시대에 운영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사상 중심의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4. 밑줄 친 ‘이 역서’가 편찬된 시기의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밭농사에 2년 3작의 윤작법이 시작되었다.
  2.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3.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고 우경이 시작되었다.
  4. 농업기술을 발달시키기 위해 「농사직설」이 간행되었다.
(정답률: 92%)
  • 질문에서 밑줄 친 ‘이 역서’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의 학자들이 중국 역서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편찬한 『칠정산』을 의미합니다. 『칠정산』조선 세종대에 완성된 우리 민족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서입니다. 따라서 세종 시대의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 정답 해설 (4번): 「농사직설」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초, 변효문 등이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을 소개하기 위해 편찬한 농서입니다. 이는 세종 시대의 중요한 농업 기술 발전 노력에 해당합니다.

    * 오답 해설:
    * 1번: 밭농사에 2년 3작의 윤작법(돌려짓기)은 고려 말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일반화되었습니다. 세종 시대에 활성화되긴 했으나,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고려 말에 더 가깝습니다.
    * 2번: 벼와 보리의 이모작(두벌농사)은 고려 후기부터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에 점차 확대되긴 했으나 전국적인 확대는 조선 후기에 더 두드러집니다.
    * 3번: 철제 농기구의 점차적인 보급과 우경(소를 이용한 쟁기질)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농업 기술입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5. 다음은 신라 토지제도의 전개에 대한 설명이다. ㉠ ~ ㉣에 들어갈 내용을 바르게 나열한 것은?

(정답률: 82%)
  • * 정답: ③
    * ㉠: 문무관료전 - 신문왕 7년(687)에 관료에게 직위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한 것은 문무관료전으로, 이는 귀족의 경제 기반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 ㉡: 녹읍 - 신문왕 9년(689)에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여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높였습니다.
    * ㉢: 정전 - 성덕왕 21년(722)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여 농민의 생활 안정을 꾀하고 국가의 조세 기반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 ㉣: 녹읍 - 경덕왕 16년(757)에 다시 녹읍을 지급하면서 귀족 세력의 힘이 다시 강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 오답 해설:
    * 다른 보기들은 신라 토지 제도의 전개 과정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식읍은 특정 공로자나 왕족에게 주어지던 토지와 그곳의 백성을 아우르는 개념이며, 민전은 백성이 소유하는 사적인 토지를 의미하므로 제시된 시기와 사건에 맞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6. 다음은 조선 건국 후 법령을 집대성한「경국대전」서문의 일부이다. 이를 반포한 국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직전제 실시 이후 심해진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를 시행하였다.
  2. 법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여「조선경국전」,「경제육전」등도 간행하였다.
  3. 왕권을 안정시키고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4. 성균관에 존경각을 짓고 서적을 소장하게 하였다.
(정답률: 68%)
  •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반포한 국왕은 성종입니다. 제시된 보기 중 성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정답 해설: 「조선경국전」「경제육전」은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편찬한 법전으로, 성종의 업적이 아닙니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반포하였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7. 다음 중 같은 국왕 대에 일어난 사실들로 바르게 짝지은 것은?

  1. (가)-ㄹ
  2. (가)-ㄴ
  3. (나)-ㄱ
  4. (다)-ㄷ
(정답률: 87%)
  • * (가) - ㄹ은 잘못 짝지어졌습니다. (가)는 적극적인 북벌운동과 어영청 확대로 효종 재위 시의 사실이며, (ㄹ)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숙종 재위 시의 사실입니다.
    * (가) - ㄴ은 잘못 짝지어졌습니다. (가)는 효종 재위 시의 사실이며, (ㄴ) 후금의 태종이 광해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황해도 평산까지 쳐들어온 정묘호란(1627년)은 인조 재위 시의 사실입니다.
    * (나) - ㄱ은 잘못 짝지어졌습니다. (나)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사건으로 숙종 재위 시의 사실이며, (ㄱ) 하멜 표착과 조총 기술 활용은 주로 효종 대의 군사력 강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 (다) - ㄷ은 올바르게 짝지어졌습니다. (다)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의 정책입니다. (ㄷ) 대동법이 처음으로 경기도에 시행된 것 또한 광해군 원년인 1608년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다)와 (ㄷ)은 모두 광해군 재위 시의 사건입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8. 다음 주장을 한 정치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1. ㄱ, ㄴ
  2. ㄴ, ㄷ
  3. ㄷ, ㄹ
  4. ㄴ, ㄹ
(정답률: 49%)
  • 제시된 주장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려 말 권문세족의 폐단에 맞서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나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정치 세력입니다.

    * ㄷ. 전제 개혁을 추진하여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신흥사대부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왕조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전법을 시행하여 토지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이는 신흥사대부의 핵심적인 개혁 조치입니다.

    * ㄹ. 군제를 개혁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구시대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삼군도총제부 등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국가 중심으로 개편했습니다. 이는 새 왕조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필수적인 개혁이었습니다.

    * ㄱ.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신흥사대부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지향했으나, 유교적 이상에 따라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전제왕권만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ㄴ. 이색, 정몽주, 윤소종 등을 숙청하였다.
    이색과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옹호하며 새 왕조 개창에 반대했던 온건 사대부였으므로 숙청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소종은 신흥사대부의 핵심 인물로, 조선 건국에 참여한 공신이므로 숙청 대상이 아닙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9. 다음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 순서로 보아 (다)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은?

  1.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였다.
  2. 고구려가 살수에서 수나라에 크게 승리하였다.
  3.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였다.
  4.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나제동맹을 맺었다.
(정답률: 50%)
  • 주어진 사건들의 시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427년 (장수왕)
    * (나) 신라가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 536년 (법흥왕, 건원)
    * (라) 백제가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하였다: 538년 또는 552년 (성왕)

    따라서 (다)는 536년 이후이면서 538년 또는 552년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어야 합니다.

    각 보기의 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였다.: 538년 (성왕). (나) 536년 이후이므로 (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고구려가 살수에서 수나라에 크게 승리하였다: 612년 (영양왕). (라)보다 늦으므로 (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였다: 527년 (법흥왕). (나) 536년보다 빠르므로 (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나제동맹을 맺었다: 433년. (나) 536년보다 훨씬 빠르므로 (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은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였다.입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0.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고려는 국초에 역분전을 지급하였고, 경종 때 처음으로 전시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2. 전시과 체제 하의 민전은 사유지이지만, 수조권의 귀속을 기준으로 하면 공전인 경우도 있다.
  3. 과전법에서는 문무 관료들에게 경기지방의 토지에 한해서 과전의 수조권을 지급하였고, 군인들에게는 군전을 지급하였다.
  4. 과전법에서는 토지 수확량의 1/10을 기준으로 1결마다 30말을 거두었으나, 답험손실법을 적용하여 손실에 비례하여 공제해 주도록 하였다.
(정답률: 56%)
  • 과전법에서는 문무 관료들에게만 경기 지역에 한정하여 과전의 수조권을 지급하였으며, 군인들에게 군전을 지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의 전시과 제도에서 존재했던 군인전(軍人田)은 과전법에서 폐지되었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1. 다음 서적들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1. 「해동고승전」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승려 30여 명의 계통을 밝힌 책이다.
  2.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쓴 것으로 고구려 건국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서사시이다.
  3. 「제왕운기」는 우리 역사의 서술을 단군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역사만큼 유구하다고 보았다.
  4. 「동국통감」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정답률: 47%)
  • 「해동고승전」은 각훈이 고려 고종 때 저술한 것으로, 삼국시대 승려들의 전기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따라서 고려시대 승려까지 다룬다는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2. 밑줄 친 ‘이 단체’의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의 언론기관이 참여하였다.
  2. 시전 상인들이 경제적 특권 회복을 요구하였다.
  3. 대한자강회 등의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참여하였다.
  4. 통감부는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하는 등 탄압하였다.
(정답률: 51%)
  • 주어진 지문의 '이 단체'는 독립협회와 '노력법과 면접법의 부활 저지 운동'으로 언급된 1898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노력법'과 '면접법'은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 특권을 의미합니다.

    * 정답 해설:
    * ② 시전 상인들이 경제적 특권 회복을 요구하였다.: 지문에 언급된 '노력법과 면접법'은 조선 후기 시전 상인이 난전(亂廛)을 통제하고 상업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법규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특권의 폐지를 주장했으므로, 이와 대립하는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특권 회복을 요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비록 지문이 '이 단체'가 독립협회의 부활 저지 운동에 참가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대립은 시전 상인의 특권 회복 요구와 이를 반대하는 흐름 간의 갈등이었으므로, 이 선택지가 역사적 맥락상 가장 적절합니다.

    * 오답 해설:
    * ①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의 언론기관 참여는 주로 애국계몽운동 시기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 ③ 대한자강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은 1906년 이후의 일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 ④ 통감부의 양기탁 구속 등 탄압은 을사늑약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하여 1907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3.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전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3ㆍ1운동을 계기로 운동 이념상 복벽주의는 점차 청산되었다.
  2.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분화되었다.
  3. 1920년대 중엽에는 신간회가 해소되고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4. 1930년대 후반에는 통일전선운동과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답률: 67%)
  • 정답인 보기의 내용은 신간회의 창립 및 해소 시기가 틀렸습니다. 신간회는 1927년에 창립되어 1931년에 해소되었으므로, 1920년대 중엽에 해소되었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릅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4. 고려시대 음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른 것은?

  1. ㄱ, ㄷ
  2. ㄱ, ㄴ
  3. ㄴ, ㄹ
  4. ㄷ, ㄹ
(정답률: 85%)
  • ㄱ과 ㄷ이 옳은 설명입니다.

    * ㄱ. 음서 제도는 고위 관료의 자손뿐만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나 왕실 외척 등에게도 적용되어 관직 진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 ㄴ. 음서 출신자도 능력과 배경에 따라 5품 이상의 고위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문벌 귀족들은 음서를 통해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했습니다.
    * ㄷ.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강력한 가문의 배경을 가진 경우 10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음직을 받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는 가문의 권세가 막강했음을 보여줍니다.
    * ㄹ. 음서는 왕의 즉위와 같은 특별한 시기에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니라, 고려 시대 내내 상시적으로 운영되던 관료 등용 제도 중 하나였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5. 우리 문화와 관련된 서적과 그 분야를 바르게 연결한 것은?

  1. 「자산어보」- 의학
  2. 「연조귀감」- 역사학
  3. 「색경」- 지리학
  4. 「벽온신방」- 양명학
(정답률: 50%)
  • * 「연조귀감」- 역사학: 조선 후기 박종화가 지은 책으로, 고종 대까지의 역대 관료들의 행적과 일화를 모아 편찬한 일종의 야사집이자 인물평으로 역사학 분야에 해당합니다.
    * 「자산어보」- 의학: 정약전이 지은 해양 생물 백과사전으로, 해양 생물학 및 어류학에 해당합니다.
    * 「색경」- 지리학: 박세당이 지은 농업 서적으로, 농학 분야에 해당합니다.
    * 「벽온신방」- 양명학: 조선 시대 유행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기록한 의학 서적으로, 의학 분야에 해당합니다.
  • 정조때 이진흥이 향리의 업적을 모아 쓴 역사서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6. 다음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족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족보의 기재 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이 족보가 편찬되었을 무렵의 가족제도에 대한 추론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1. ㄱ, ㄴ
  2. ㄱ, ㄹ
  3. ㄴ, ㄷ
  4. ㄷ, ㄹ
(정답률: 68%)
  • 제시된 족보의 기재 방식은 당시의 가족제도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 "자녀는 출생 순서에 따라 기재하였다." 이 조항은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들을 우대하고 딸을 경시하는 후대의 가족 제도와는 다른, 성별에 따른 차별이 적은 평등한 가족 제도였음을 시사합니다.
    * "딸이 재혼하였을 경우 후부(後夫)라 하여 재혼한 남편의 성명을 기재하였다." 딸이 재혼한 사실과 그 배우자의 정보를 기록했다는 것은 딸 또한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여성의 재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후대보다 자유로웠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추론하게 합니다.
    * "자녀가 없는 사람은 무후(無後)라 기재하였고, 양자를 들인 사례는 거의 없다." 자녀가 없는 경우를 기록하되, 양자(특히 아들)를 들이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굳이 아들을 통해 대를 잇는 것에 대한 강박이 후대만큼 강하지 않았거나, 딸을 통해서도 대가 이어진다고 보았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각 보기를 판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ㄱ. 적서의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 제시된 내용은 자녀의 출생 순서 기록, 딸의 재혼 기록, 양자 제도의 미발달 등에 관한 것으로, 적서(嫡庶) 차별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당시에도 적서의 차별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ㄴ. 친영제도가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친영제도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데려오는 방식으로, 후대 조선 사회의 전형적인 부계 중심 결혼 제도입니다. 딸의 재혼까지 기록하는 등 딸을 중시하는 태도는 오히려 여성의 지위가 높고 친가와의 유대가 강했으며,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과 같은 형태가 남아있던 시기와 더 부합합니다. 따라서 친영제도가 일반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ㄷ. 형제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자녀를 출생 순서에 따라 기재하고 딸도 중요한 구성원으로 기록한 것은 아들 중심의 제사 문화가 확립되기 이전의 모습입니다. 이 시기에는 아들과 딸이 번갈아 제사를 지내거나,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올바른 추론입니다.
    * ㄹ. 재산 상속에서 아들과 딸의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 자녀를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고 딸의 재혼까지 중시한 점은 아들과 딸에게 동등한 상속권을 부여했던 조선 초기 가족제도의 특징과 일치합니다. 이는 올바른 추론입니다.

    따라서 옳은 추론은 ㄷ과 ㄹ입니다.

    정답: ㄷ, ㄹ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7. 밑줄 친 ‘그의 사상’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고려 무신정권의 비호 아래 천태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2. 왕권 우위의 중앙집권적 귀족사회에 적합한 이념 체계를 제공하였다.
  3.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4. 고려 후기의 불교계를 선종 중심으로 혁신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답률: 75%)
  • 주어진 지문의 사상은 고려 후기 승려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설명합니다.

    * 정답: 고려 후기의 불교계를 선종 중심으로 혁신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과의 통합을 시도하고, 당시 타락했던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운동을 주도하여 조계종을 창시했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 불교의 중요한 흐름이었습니다.

    * 오답 해설:
    * 보기 1: 천태종은 의천에 의해 개창되었으며,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불교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보기 2: 지눌의 사상은 개인의 내면적 수양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치 이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습니다.
    * 보기 3: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은 불교가 아닌 성리학이었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8. 남북국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옛 지배층에게 관등을 주어 포용하였다.
  2. 신라의 6두품 출신들은 학문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진출을 활발하게 하였다.
  3.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었는데 이들은 지배층에 편입되지 못하였다.
  4. 발해는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으나 고구려와 말갈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정답률: 65%)
  • 해설:
    발해의 주민 중 다수가 말갈인이었으나, 이들은 단순히 피지배층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 및 군사 조직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일부는 고위직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말갈인이 지배층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19. 다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가) 시기에 일어난 사실이 아닌 것은?

  1.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2.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3.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4.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정답률: 84%)
  • (가) 시기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년 12월)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1948년 8월 15일) 이전까지의 기간입니다.

    *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5월)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년 5월~8월) 모두 (가) 시기에 결렬되었습니다.
    *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9월 22일에 제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가) 시기에 일어난 사실이 아닙니다.
    *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여 남북 협상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가) 시기에 해당합니다.
    *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습니다. 이는 (가) 시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가) 시기에 일어난 사실이 아닌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20.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돌로 방을 만들고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설치하였다.
  2. 황남대총, 장군총, 천마총 등의 사례가 있다.
  3. 무덤 안에 벽돌로 널방을 만들고 그 안에 돌로 덧널을 설치하였다.
  4. 무덤 안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서봉총 등의 사례가 있다.
(정답률: 50%)
  • 정답 해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은 도굴이 어려운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부장품이 온전히 남아있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서봉총은 황남대총, 천마총 등과 함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답 해설:
    * "돌로 방을 만들고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설치하였다."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의 특징입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돌방과 외부 연결 통로가 없습니다.
    * "황남대총, 장군총, 천마총 등의 사례가 있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은 돌무지덧널무덤이 맞지만, 장군총은 고구려의 계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입니다.
    * "무덤 안에 벽돌로 널방을 만들고 그 안에 돌로 덧널을 설치하였다."벽돌무덤(磚室墳)의 특징입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벽돌을 사용하지 않으며, 나무로 덧널을 만들었습니다.
profile_image
1

*오류신고 접수시 100포인트 지급해드립니다.

< 이전회차목록 다음회차 >